가족의 죽음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 익명 심리상담 커뮤니티 | 마인드카페[공황|우울증|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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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죽음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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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안녕하세요. 올해 22살이 되었습니다. 우선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싶은 이야기를 하려면 해야할 이야기도 참 많아지지만, 열심히 간추려 보도록 할게요. 사실 쓰고 보니 구구절절 말이 길어요. 엄청 길어요. 그래도 줄인거지만.. 답답한 속이 좀 풀린것 같아요. 우선, 저희 어머니께서는 다발성 골수종 혈액암 투병 환자이십니다. 인구 10만명중 2.9명 꼴로 발생하는 희귀암이자 재발률 8~90%의 난치병입니다. 의료 공제가 되지 않는 치료약(200만원/월)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는 환우분들도 계십니다. 어머니는 2017년에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으시고 현재까지 요양중에 계십니다. 그러나 온갖 합병증이 함께 오는 탓에 일상생활이 가능한 몸은 아니세요. 그리고 2020년이 되었습니다. 조혈모세포를 이식 받은지 2년이 되었어요. 병이 재발할 위험한 시기가 온거죠. 그것도 깜빡하고 신년이라 좋다며 어머니 신년계획을 물어봤던 저는 어머니가 올 해를 넘길 확률이 2할이라는 것과, 급작스런 유고시를 대비해 이제는 유서 및 재산 문서 작성을 해야겠다는 말을 대답으로 들었고요. 어머니께서는 담담하신데 제가 울컥할수는 없어서 방으로 들어와 몰래 울었습니다. 이제는 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사실 어머니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되려 2017년도의 저는 굉장히 무정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어요. 심리적으로 가족을 가족이라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 극심한 우울증이 겹쳐, 아. 엄마가 죽으면 그냥 나도 따라 죽어야지. 아냐. 지금 죽고싶은데 부모보다 먼저 가는건 그래도 도리가 아냐. 아직은 살아보자.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이혼한 아버지와의 양육비 문제는 언제나 장남인 4살 터울 오빠가 아닌 초중학생이었던 제가 연결다리가 되어서 말을 전해야 했고, 금전적인 부분으로도 어머니 발병 전부터 압박이 있었거든요. 한창 제가 사춘기를 겪던 중학교 시절은 질나쁜 학교 아이들 때문에 전교에서 따돌림을 당한 스트레스가 너무 컸습니다. 때문에 저는 지금도 중학교 시절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로 남아있지 않아요. 초등학교 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다행이에요. 그 시절의 저는 시간이 약이라 생각했고, 그때의 기억은 어렴풋하니 이제 웃고 넘길수 있는 일이 되었거든요. 아빠 자리를 대신해 어른 노릇을 하려던 어린시절의 오빠에게 육체적 체벌을 받아 피멍이 들정도로 맞고 두시간 넘게 속옷 한장 걸치고 엎드려뻗쳐를 하는 등의 일은 모두 어머님 몰래 벌어진 일이었어요. 오빠가 저를 괴롭히는 것의 시작은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하루에 3~5번씩 혼자 벌이하시는 바쁜 어머님께 전화하며 "엄마~ 오빠가 ㅠㅠ~" 하는 징징거림을 듣다 못한 어머님은 제게 '넌 너무 고자질쟁이야. 고자질 좀 그만해.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로 엄마한테 전화하지 마.' 라고 말씀하셨어요. 귀찮은 뉘앙스의, 이제와서는 업무와 육아 스트레스에 그럴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어린 날의 제가 받은 말 한마디 한마디는 이렇게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그래서 저는 그 뒤로 어머니에게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고자질을 하지 않았어요. 중학생때, 제가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오빠로 인해 허벅지에 큰 피멍이 들었던 날은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제서야 어머니에게 알렸어요. 뭐라 하실까봐 직접 말하지도 않고, 퇴근하신 어머니 앞에서 피멍든 다리를 가지고 휘적휘적 걸어다닐 뿐이었어요. 물꼬를 트는건 그걸로 충분했죠. 오빠는 호되게 혼이 났어요. 그래서 제 속이 시원했을것 같나요? 그냥.. 사실 그냥 그랬어요. 어머니는 제가 학교에서 왕따를 심하게 당한다는 것도 3학년 1학기가 끝날때쯤이 되어서야 알게되었거든요. 언제나 그렇듯 어머님은 제게 관심이 없으셨어요. 일하느랴 바빠서 관심을 줄 시간도 없었거니와, 어릴적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오빠를 뺐겨 키우다시피 해서 오빠에 대한 애정이 저보다 크셨거든요. 오빠는 자기 혼자만 잘난 맛에 사는 (현재까지도) 애어른이고요. 저희 가족은 그렇게 쉐어하우스의 동거인처럼 살았어요. 어머님의 항암치료 당시에는 학교가 끝나면 주말마다 먼 서울대병원으로 가서 어머니를 돌봤어요. 아실분은 아시겠지만 긴 병에는 효자가 없죠. 저는 처음부터 효녀는 아니었지만 말예요. 아픈 사람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입니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까지 언성을 높인다고? 할 정도로 굉장히요. 저도 덩달아 밤새벽 내리 이어지는 간병과, 찜질방 매트보다 못한 간병인 침대에서 잠을 자고, 피곤하고 예민한 상태였고, 남보다 못한 가족 사이라 생각했던 어머니를 대하니 관계가 좋아질리가요. 더욱 악화되었죠. 게다가 저희 집안의 유일한 수입은 어머니의 소득이었는데, 무거운 병원비와 약값의 납부 아래서 기존의 풍족한 생활은 없어져버렸어요. 어머님께서 투병생활을 시작한 후 오빠는 군대로 날아가버렸고 휴가를 나와서도 무심하게 놀러 다니기 바빴습니다. 저는 졸지에 자취의 형태로 혼자 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다행하게도, 저는 지역에서 꽤 괜찮은 상고로 진학했었어요. 3학년이 되어 취업을 해서, 어떻게든 이 상황에 보탬이 되어야지. 라는 생각이었죠. 제 우울증은 중학교 때보다 나아졌긴 하지만, 그때까지도 삶의 의욕은 없었거든요. 돈을 모아서 뭔가 큰 일을 하기보단 그저 근근이 먹고 살 정도의 돈에 안정감을 느꼈어요. 어머니의 항암치료 및 입원기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저는 첫 취업을 했어요. 첫 사회생활, 입사 첫날 퇴근을 하는데 어머니 생각이 나더라구요. 어머니는 이보다 힘들게 나와 오빠를 키웠는데. 처음으로, 어머니에게서 공감대와 이해를 쌓았던 퇴근길 버스 안에서 저는 어머니 전화를 받게되었어요. 요양 차 제주도로 내려가셨다가 얼마 전에 올라온 어머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또 입원을 하셨다고요. 지금은 심호흡 한번 하고 말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악재가 겹치니 괴로웠습니다. 어머님이 제주로 요양을 가시고 저는 혼자 회사를 다녔던 1년은, 떨어져 지내니 살만한지 모녀관계가 회복되는 해였어요. 그러나 동시에, 그 해와 그 다음해 모두, 저에게는 가족 문제와 더불어 외적으로도 견디기 힘든 일들이 많이 일어났죠. 저번에 강원도 속초에 난 큰 산불이 시내와 강릉까지 번진 뉴스를 보셨나요? 그 시기가 마침 어머님이 고향인 속초로 잠시 가 계신 때였어요. 어머님이 영상을 보내셨는데, 바로 앞 아파트단지 뒷산이 활활 타며 시내까지 내려오더군요. 어머니가 걱정이 되었어요. 회사를 다니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사회를 경험하고 비로소야 홀로 저희 남매를 여기까지 키워내신 어머님의 헌신이 느껴졌고, 어머니 생각에 시도때도 없이 업무중에도 몰래 울었어요. 그리고 연말, 평소 심신이 약했던 저는 결국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일상 생활이 어려운 극심한 공황장애로 회사를 그만두었어요. 어머니는 무릎연골파열로 또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고, 당연하게도 백수인 제가 그런 어머니 곁에서 간병을 도맡아 했어요. 익숙한 일이 되어가서인지 어머니를 이해할수 있게 되어서인지 이제는 그저 가족인 어머니로만 느껴졌어요. 물론 인간적으로 흠이 없는건 아니지만, 저를 향한 헌신이 헛되거나 없던 일은 아니잖아요. 밤부터 통증으로 잠 못이루는 어머니를 새벽 3시까지 마사지 해드리는건 기본이고, 자다가도 새벽에 일어나 아픈 어머니 전신을 마사지 해드리며 잠을 설치는 경우는 허다해요. 거의 매일 밤을 그렇게 하고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요. 신은 언제나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을 준다는데, 저라는 인간이라는 컵에는 이미 넘쳐 흐를 정도의 무거운 시련이 퍼부어지는 느낌이었어요. 오기로 버텼어요. 신은 그저 시련을 퍼붓는데,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이미 죽어서 그런 말이 퍼진거라는 웃고 넘어갈 농담을 진지하게 곱씹으면서요. 오냐 니가 이기냐 내가 이기냐 하는 마음으로 믿지도 않는 신을 욕하기도 했어요. 아버지와의 문제. 돈에 대한 문제. 많은 사람이 으레 하듯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 아직도 찾지 못한 내 진로에 대한 고민들. 다 괜찮다 납득했지만 가끔씩은 터져나오는 쓸모없는 한탄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는데, 제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도 저는, 투병생활을 시작한 직후 어머님이 해주신 말씀을 떠올리며 행동했어요.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었죠. 사실 그렇잖아요. 가장 힘든건 제가 아닌 어머님인데, 언제나 제 앞에서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어머니는 최선을 다해 병을 이기려 하셨어요. 변함없이 밝게 웃으시고요. 작년의 저는 대학 준비로 1년을 공부에 매진했어요. 무기력증과 우울증, 건망증이 심해진 어머니를 위해 간단한 악기를 사들고 와 그 앞에서 연주하며 어머니께서 좋아하는 음악을 권유해보기도 하고, 제 취미생활인 아크릴 그림 캔버스 작업을 도와줄테니 같이 하자 말하는 등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열심히 퍼다 날랐죠. 소용 없었지만요. 그렇다고 저희 어머니가 매일 우울에 빠져있는건 아니에요. 힘들지만 걷기 운동을 하시고,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고 놀고, 이제는 군복을 벗고 정장을 입고다니는 인턴사원인 오빠의 퇴근 후 저녁밥을 손수 챙기시는데 보람을 느끼시죠. 겉으로 보기엔 참 단조로운 일상들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이런 지루한 평온함이 진짜 내 것인줄로 착각해요. 전 원하는 학교는 합격했지만 등록금 문제로 투잡 알바를 뛰고 있고 그건 한 학기 등록금 채우기도 벅차죠. 오빠와의 유대감 형성은 여전히 불통, 아빠와 새엄마와의 문제. 이런 것들은 사실 가장 중요한게 아니에요. 언제 병이 재발하고 급작스럽게 돌아가실지 모르는 어머님. 차마 부끄러워 뱉지 못하는 사랑한다는 말을 이제서야 이름 앞에 붙여드리고 싶을 정도로 감사한 어머니가 되었는데 사실 이제까지 어머니와는 쌓인 앙금을 제대로 풀어본 적이 없어요. 앙금의 잔재로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머니의 스킨쉽에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데, 그 때의 기억이 없거든요. 중학교 때 기억을 잊은 것처럼요. 그래서 풀 수가 없어요.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가정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려 하는데, 참 막막한게 많아요. 저는 성인이지만, 정말 사회의 멘토 없이 홀로 서기를 해야한다니 두려운 마음이 앞서기도 하고, 어머니라는 당연했던 존재 자체의 상실에 무서워서 눈물이 나요. 제가 후회하지 않을 방법은 어머니에게 더 잘 해드리는 효녀가 되는건데, 알면서도 어머니 앞에서는 언제나 어른스럽지 못한 어린 아이가 되는것 같아요. 어머니 앞에서 울기 싫고, 이런 속마음을 다 까발리기도 싫어요. 쪽팔린 것도 있지만.. 괜히 의연하신 어머니 앞에서 제가 그러면 어머니도 마음이 흔들릴까봐서요. 아버지는 뭐하냐는 궁금증이 드실수도 있겠네요. 그 분은 제가 작년, 친가 할머니의 장례식장에 가서야 1년만에 얼굴을 뵈었어요. 제가 아주 어릴때 이혼해서, 제대로 된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분은 아니시고.. 중국인인 새엄마가 한국에 적응을 못한다며 내년에 중국으로 가서 노년기를 살 예정이셨다 하더라구요. 아들, 딸에게 말 없이요. 언제나 감언이설로 관계회복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가, 결국엔 멋대로 실망만 잔뜩 안겨주는 사람이라 이제 저도 포기하려 해요. 어쨌든.. 제목처럼, 이런 가족의 죽음에 대해서 참.. 어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머리로는 인지해도 언제나 당혹스럽고. 울컥하고 눈물이 나요. 누구에게라도 이런 고민을 털고 싶은데 괜히 듣고싶지도 않은 짐을 옮겨서 부담만 주는것 같아 매번 혼자 삼키는데.. 주변 사람이 죽은건 처음이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얼마 전엔 할머님이 돌아가셨죠. 그렇지만 이렇다 할 추억이 없어서 그저 싱숭생숭한 마음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어머님이 돌아가신다는 건, 그저 사람이 한명 죽었다는 말과는 그 감정의 깊이가 너무 다른거예요. 쓰다보니 감정히 너무 격해지네요. 이렇게 긴 글을 쓸 생각이 아니었는데.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신년부터 마음은 이렇게 우울한데, 할 일은 할 일이어서. 오늘은 운동 피티도 20회나 끊었어요. 사실 너무 비싸서 그 돈은 등록금에 넣어야지 했는데 어머니가 꼭 하라고 하셨거든요. 저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어요. 아마도요. 주변에서는 강박이 아니냐고 너무 열심히 살고 있으니 조금 게을러도 괜찮다 하지만.. 저는 지금도 제가 게으르다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ㅋㅋ 자기전에 누워서 넷플릭스도 한시간 넘게 본다구요! 아무튼 제가 하고싶은 말은, 힘내는건 정말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저는 힘 낼거지만.. 가끔은 오늘처럼 주체 못하고 울음도 터지지만.. 그래봤자 인생의 문제 해결은 저절로 이뤄지는게 아니니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거죠. 그렇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해답을 못찾겠어요. 어떻게 끝맺음을 해야할까요. 우리 모두, 항상 바라는대로 좋은 일만 일어나는 인생은 아닐테지만.. 그래도 여러분이 힘든 시기에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비록 사소한 것에서라도 한 줌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한 해가 되시길 바랄게요.
슬퍼혼란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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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가 달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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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opopo12
· 4년 전
님 정말 멋지시고.. 어떤부분에서는 존경스럽습니다. 와.. 정말 본인은 모르시겠지만 천사같으세요.. 어떻게 더 잘해드릴 수 있죠? 이미 너무 잘하고 계신걸요^^ 그리고 사람의 뇌는 똑똑해 사무치게 아픈기억, 기억하기도 싫은기억은 아예 기억이 안나게 삭제시켜버린대요. 저도 그래서 중고등 시절은 정말 친구이름도 잘 기억이 안나요. 기억이 안나는 만큼 어머님과의 안좋았던 관계도 훌훌 털어버리셨음 좋겠어요. 그리고 어머님이 정말 안그러시겠지만 행여 세상을 떠나시면 이번 삶 너무 수고하셨다고 사랑한다고 꼭 말씀드리고 보내드리세요. 그게 정말 잘 안나오고 힘든 말인거 알지만.. 잘 보내드리는 것도 정말좋은 효도라고 생각해요. 잘보내드리고 잘 마음추스려서 다시 내 삶을 꿋꿋이 살아가는거, 정말 부모님이 바라시는 거거든요^^ 그리고 지금도 저보다 넘 열심히 안게으르게 살고계신데..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잘 헤쳐나가실거라 100% 장담할게요❤ 화이팅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