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초3이라는 나이가 된 무렵 처음으로 친구 - 익명 심리상담 커뮤니티 | 마인드카페[왕따|자살|폭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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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어릴 적 초3이라는 나이가 된 무렵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소외감이라는 아주 무겁고 슬픈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왕따였다. 구타를 당한 것도 아니였지만 어린 나이 아빠가 없다는 이유로 친구들 부모님 사이에서는 난 어울려서는 안되는 아이였다. 그래도 꿋꿋히 살아가려고 했다. 우리 반의 반장이였던 아이가 " 얘 아빠 없다고 우리 엄마가 이런 얘랑 어울리면 안된다고 그랬어! " 이 말 한마디에 내가 힘겹게 꾸역꾸역 지키고 있던 내 행복이 깨져갔다. 아이들은 통통한 내 몸이 아빠가 없어서 뚱뚱해지는 병에 걸리는 바이러스라고 칭했고. 아이들은 내 뒤를 쫒아다니며 놀리기 급급했다. 괴로웠고 힘들었고 슬펐다. 그래도... 그래도 참으려고 해봤다. 버티려고 했었다. 아빠는 없지만 날 사랑해주는 엄마와 할머니. 아빠같았던 할아버지와 큰 외삼촌이 있어서 버티려고 해봤다... 근데 그런 내가 싫었던건지 어느날 반장의 엄마가 담임선생님께 돈을 주는 모습을 보았고.. 선생님은 대놓고 날 차별하셨다. 그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난 죽음이라는 자살이라는 자해라는 생각을 가졌고 점점 우울함에 빠졌다. 힘들어도 웃고 슬퍼도 웃고. 어떻게든 참으면서 4학년 5학년 6학년을 버텼다. 행복해야만 하는 나이에 행복을 잃었고. 이뻐야하는 나이에 난 날 죽이는 꿈을 꿨다. 나도 모르는 내면에 모든게 내 탓이고 모든게 내 죄라고 생각했나보다. 그때부터였다. 누군가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날은 나의 또래 아이였고 어느날은 조금 나이가 든 20대 정도의 여자의 목소리, 어느날은 중년의 남성의 목소리, 어느날은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매일매일이 환청과 날 죽이는 꿈을 꾸는게 일상이였고. 참은게 일상이였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의 마지막 대청소날 날 너무나도 놀리던 아이를 때렸다. 때리고 때리고 때리고 때려서. 그아이가 울고 말을 못 할 때까지 대***의 막대 부분으로 미친듯이 아이를 때렸다. 그리고 정신이 돌아왔을 땐.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과 깜짝 놀라 뛰어온 담임선생님셨다. 내가 왕따를 당하는 것도 아셨고, 날 이뻐하셨던 선생님의 그 표정을 보니 손이 떨렸다. 혼날까봐, 또 다 내탓이 될까봐 무서워서 눈을 감았고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소리도 없이 천천히 떨어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셨다. 괜찮다고. 미안하다고.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을 이제서야 듣게 되서일까 아니면 이렇게 까지 되고 나서야 들어서 일까 눈물이 멈추치 않았다. 그대로 조퇴를 해 집에 왔고. 졸업식을 할때까지 담임 선생님의 눈을 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날 심하게 괴롭혔던 아이 중 한 아이와. 같은 학교로 오게 되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다른 반이였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자아이들은 날 바이러스 취급하였고. 여자아이들은 내 앞아서 대놓고 욕을 하고 무시했다. 혼자 옷을 갈아입으면 느슨한 탈의실의 문을 남자아이들이 발로 차 열었고 그때마다 난 다행이도 옷을 입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쉽다면서 나갔고 난 탈의실에서 쉬는 시간 내내 울었다. 그 이후부터 탈의실이 아닌 혼자 화장실로 가 갈아입는 일이 잦았고 다 괜찮을 줄 알았던 내 중학교 시절에 또 다시 고통이 찾아왔다. 헛소문이 퍼졌다.. 아이들은 생각이 어려서인걸까. 사실여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대충 알고 있는 소문을 말하자면.. 내가 인터넷 상에서 남자를 만나 몸을 대준다는 소문, 속옷을 안 입고 다닌 다는 소문, 등등이 있었다. 아이들은 뒤에서 몰래 속닥거렸고 대놓고 날 괴롭혔다. 그래도 그 사이에서 사귀었던 친구가 있었다. 꽤나 이기적이였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반 통합하여하는 수업이 있었는데. 내 허락 없이 D를 앉히고 네게 의자를 가져오라고 했다. 화가 났고 어이가 없었다. 처음으로 A에게 화를 냈고. A는 어이가 없다며 그럼 혼자 앉으라고 하였다. 혼자 앉았고.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삐졌냐고 묻는 그 A에게 난 화난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 후부터 나에게 이야기를 걸지도 않았고 나와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아이들과 다니며 나와 어울리지도 못 하게 했다. 결국은 내가 사과를 하였고. 뒤에서 나와 A의 사이를 이간질 하는 B를 알게 되었고 B에게 따지자. 또 다시 에게 다가가 내가 A의 욕을 했다며 이간질을 하였고. 또 다시 싸우게 되었다. 날 믿지 않는 A가 싫었다. 그러면서도 A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내가 싫었다. 또 다시 칼을 들었다. A와 했던 약속을 어기려고 했다. 근데 그러면 또 다시 친구를 잃을 까봐 하지 못했다. 겨우 화해를 하였음에도 갈등은 3학년 때 계속 되었다. A가 내 치마를 빌려갔다. 좋아하는 오빠와 데이트를 한다고, 그러곤 치마를 돌려주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반에 찾아가 돌려달라고 말을 하자 잃어버렸다고 한다.. 당장 1주일 뒤에 면접이라 주어야한다고 찾아주던지 새로 사달라고 하자. 그렇게 급하면 내게 찾으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난 내 치마를 찾으러 돌아다녔고 찾지 못해 A에게 내 치마를 새로 사다 주던지 돈을 달라고 하였고 입에 담지도 못할 욕들이 왔다 굴하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게 아니였으니까 매일매일 찾아가 달라고 하였고 없으면 쪽지를 남겼다. 그제서야 돌아왔다 아니, 그 아이가 입던. 치마를 내게 준 것이였다. 속치마는 다 찢어지고. 치마 수선을 한건지 치마가 멀쩡한 곳이 없었다. 심지어 치수도 맞지 않았다. 결국 교복을 입지 못하고 면접을 봤고. A에게 치마를 돌려주고. 내 치수를 알려주었다. 그러자 A의 친구들이 찾아와 A를 괴롭히지말라고, 찌질해보인다고.... 너무 너무 화났지만 참았다. 왠지 맞는 말 같아서 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A에겐 당당히 요구했다. 치마를 돌려주지 않으면 학폭위와 함께 경찰소에 제물손괴죄로. 신고하겠다고. 또다시 욕을 한 장문의 페메가 왔고. 곧장 차단을 먹었다. 다 캡처를 하고. A의 어머니에게 보냈다. 엄마한테도 처음으로 말했다. 엄마가 그렇게 화내는 모습을 처음 봤다. 엄마 덕분에. 교복을 새것으로 돌려받았고. 이쁘게 교복을 입고 졸업을 했다. 그 후. 고등학교에 올라와. 중학교때 남자아이들과 싸우게 되었다. 아주 사소한 일이였다. 게임을 보내지 말아달라는 상메를 무시하고 보낸 아이에게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그걸 본 고등학교 카톡방에서 사귄 친구가 화가 나가 그 친구를 초대해 단톡방에서 그 아이에게 뭐라고 하였고. 그 남자아이는 중학교 시절 날 집요하게 괴롭히던 남자아이들을 불러 피해망상을 가진 ***로 취급하며 이야기했다. 그 외중에서도 한 아이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봐줄 생각이 없었다. 어떤 사과든 듣기 싫었다. 그냥 다신 내 눈에 띄지 않는 걸로 끝냈으나.. 또 다시 내가 날 죽이는 꿈을 꾸게 되었다. 피해망상에 빠진 ***라며 내가 나에게 욕을 하고 죽이고 있었다. 또 다시 우울함에 빠졌고 고등학교 갈때까지 마시지도 먹지도 잠을 자지도 않아 90kg 육박하던 몸이 50kg 때로 쭉 빠졌다.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1달전부터 식욕이 예전보다 심해지더니 폭식을 매일매일하게 되었다. 먹고 헛구역질을 하고 바로 잠을 잤다 내가 살기 위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새벽에 일어나면 어김없이 토를 했다 그렇게 1달을 반복했고 또 다시 살이 찐 상태로 교복을 사고 입학하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온지 2년동안 사귄 친구들이 두려웠고 무서웠으며 믿을 수 없었다. 3학년이 시작될 때 쯤이야 이 아이들을 믿을 수 있었고 겨우 겨우 행복을 찾은 줄 알았다. 신은 내가 행복한 걸 볼 수 없는 걸까? 내게 가장 소중한 할아버지가. 행복해진지 3개월 만에 할아버지를 데려가셨다. 너무 슬펐다 그래도 울지 않기로 했다 할아버지가 내게 남긴 유언이였으니까. 할아버지가 죽어도 울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참았다. 어른들이 울 때 참으려고 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도 울지 않았다 울음을 참았고 울음소리를 삼켰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5개월... 가족들은 이제 울지 않는 다. 할아버지 사진을 봐도 울지 않고 편안해 보였다. 난 너무 슬픈데 추모할 기간이 없었다. 또 내 탓인줄 알았다. 마지막 모습을 내가 보지 않았다면 할아버지가 내가 보고 싶어서 또 집에 오려고 힘냈을 텐데. 그랬으면. 가족들이 다 있는 집에서 돌아가셨을 텐데. 다 내 탓같아서 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살 희망도 없다고 느꼈고 살기 싫단 생각 뿐이였다 매일 매일 울었다 새벽내내 울다 아침에 잠들었다.. 지금도 매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시각만 되면 눈물이 흐른다. 내가 고장난 것 같았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더 숨겼고 운 것이 들킨 날이면 슬픈 영상을 봤다고 거짓말을 했다 들키면 숨을 더 참고 울었고 소리를 막았고... 그러다.. 그러다가... 내 손으로 목을 졸랐다. 숨을 쉴 수 없을 때까지 조르고 졸라 눈물이 멈추면 손을 떼어냈다.. 이렇게라도 울음을 멈출 수 있어서 편했다 다행이였다. 이게 어른들이 이쁘고 아름답고 즐거워야한다는 나의 10대였고 나의 마지막 10대였다. 그리고 난 내 10대를 슬프고 고통스럽고 외롭고 저주스러운 10대였다.
힘들다속상해두통트라우마답답해조울어지러움공허해괴로워부끄러워불안무기력해분노조절호흡곤란우울해스트레스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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