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자신이 모호한데 숨 돌릴 시간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 익명 심리상담 커뮤니티 | 마인드카페[MBTI|상담|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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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신이 모호한데 숨 돌릴 시간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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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안녕하세요, 저는 26살입니다. 요즘 무기력하고 때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고 쳐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저는 많이 내향적이고 조용한 성격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언니와 있을 때는 장난도 치곤 했지만 친구들은 항상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습니다. 낯을 많이 가리고, 앞에서 발표를 시키면 덜덜 떨지만 그 자리에서 버텨서 하곤 했었어요. 중학교 때도 조용한 편이고 쉬는 시간에는 학원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습니다. 친구들과 밥을 같이 먹을 때도, 따로 먹을 때도 있었고, 이동 수업이나 집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집에 와서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좋아하는 주제가는 모두 외우고, 때로 집에 와서 엄마가 안 계시면 외로워서 울고는 했던, 그런 학생이었어요. 부모님이 함께 학원을 운영하셨기 때문에 방과 후에는 집에 계시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공부는 잘 해서 부모님 학원에서는 한 학년 위의 언니 오빠들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버거웠지만 성실했고, 성적은 괜찮은 편이어서 외고를 지원해도 괜찮겠다 싶은 정도였어요. 친구들은 저를 조용하지만 잘 웃고 착한, 그런 모습으로 받아 주었던 것 같습니다. 학원을 하시며 교육열이 있으셨던 부모님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외고와 같은 학비라면 차라리 유학을 보내주기를 선택하셨고, 제가 중학교 3학년을 다닐 때에 언니와 함께 학비가 비싸지 않은 미국의 사립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4년 동안 적응은 할 수 있었지만 갑자기 환경이 바뀌는 바람에 첫 해에 저는 건강이 안 좋아졌고, 체중이 많이 빠졌습니다. 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다행히 몸 상태도 그렇고, 월경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방학 때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언니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끔 나갔지만, 저는 그 해 방학은 한국의 집에서 대부분 침대에 누워 지냈습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움직이기 힘들었거든요. 꼬리뼈가 둥글게 튀어나와서 정형외과에 갔는데, 그래도 굽은 정도가 정상 범위 내에 있다고 했습니다. 척추도 보았는데, 살짝 측만이 있지만 각도가 많이 심하지 않다고 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운동은 전문적으로 배우기보다는 인터넷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이것저것 했고, 다행히 칼슘을 먹으니 뼈가 조금 나아지는 걸 느꼈습니다. 고등학교라 휴학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필요한 물품을 한국에서 챙겨서 갔습니다. 고등학교가 시골이었는데 중간에 도시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는 차를 타는 대신 많이 걸어다닐 수 있어서 나름 건강도 챙길 수 있었고,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친구들과 잘 이야기하고 약속을 잡던 언니와 함께 친구들과 추억을 쌓았습니다. 용돈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 생활비를 모아서 다같이 맛있는 것도 먹기도 하면서, 힘들었지만 좋은 성적으로, 추억으로 고등학교를 잘 졸업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대학 전공을 정할 때, 생물학과 영양을 좋아했던 저는 자연에서 신체에 약이 되는 물질을 추출하여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생화학 과정을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버거운 학문이었고, 성실하게 공부하는 타입이었던 저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학업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고민을 거듭하다가 무기력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인데, 그 당시의 저는 어렵더라도 하나님이 인도하신 곳에서 최선을 다해 제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전공을 바꾸는 것도 알아보았지만, 호르몬제로 되돌렸던 월경도 다시 끊겼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밥도 잘 못 먹고 도망치고 싶어서 잠에 빠져들었고, 씻어봐야 변하는 게 없다는 생각에 샤워를 안 하기도 했고, 체중은 내려갈 대로 내려갔고, 갈비뼈가 보였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라 제자리에 가만히 붙박여 있었고, 고민할 때마다 머리카락을 만지곤 했기 때문에 다 쥐어뜯어 머리 한가운데가 머리카락 없이 비었습니다. 보다 못한 언니가 탈모도 생겼다며 부모님께 이야기했고, 부모님은 휴학을 하고 집에 돌아오게 하셨어요. 오기 전에는 언니에게 뭐든 돈 생각 말고 제가 먹고 싶은 것은 사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했다고 생각해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때 제 수준으로는 방법을 고민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모르겠어서 말 그대로 항상 고민했습니다. 그 때까지는 할 일이 많을 때는 항상 바쁘게 움직여야 했는데, 그 상황에서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답답했고, 오줌이 마려우면 너무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당시는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많이 불안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학 기숙사에서 늘 시간이 없어 공부만 하던 일상과 학기 중 일주일의 방학 동안 언니는 알게 된 한국인 언니들과 여행을 갔지만 나는 혼자 남겨져 있었던 일, 교회에 갔을 때 언니는 활동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나는 관계를 공유하지 못하고 혼자 있었던 일, 생물 실험 시간에 스스로 실험 설계를 하지 못하고 파트너가 도와 달라고 하는 대로만 도와 주었던 일, 언니는 스스로 자기 스케줄대로 움직이는데 나는 어쩔 줄 모르며 부모님의 전화를 받으며 하라는 대로 했던 일 등을 생각해보고, 보통 사람들은 내가 먼저 나서지 않으면 나를 챙기지 않고, 언니가 아는 사람들이 내가 아는 사람들이 돨 수 없으며, 내가 스스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할 일을 정해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자리잡았습니다. 언니는 독립심이 강하고 집안 사정(돈)을 볼 줄 압니다. 주변 사람들과 교류하고, 어떤 공부를 해야 취업에 도움이 될지, 쓰임새를 혼자 찾아나갔고 낭비도 싫어해서 자신을 관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움직입니다. 예전에는 숫기가 없었다고 했는데, 친구들에게 말을 걸면서 많이 활발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노력하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저는 제가 그래서 사회적인 면, 재정을 생각하는 면이 부족하고, 또 수동적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의 저는 자기비하가 심했고 자존감 또한 낮았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아빠께서 우리 가족은 좋아하는 나무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부모님은 과실이 열리는 나무를 말했는데 저는 벚나무를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아, 나는 또 이렇게 열매가 없으면 따먹지도 못하는데 또 사는 데 쓸모없는 것만 생각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펑펑 울었습니다. 왜 우는지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요. 저를 집에 혼자 두고 있으면 불안해서인지, 부모님은 저를 일터에 데리고 가셨습니다. 엄마께서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셨는데, 모르는 게 있으면 제게 가르쳐 주도록 하셨습니다. 가르쳐 주면서도 학원에 있으면 이러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슬펐습니다. 제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니 늘 긴장해 있어야 했습니다. 하루는 날씨가 추우니 대학 기숙사의 추웠던 환경과 비슷하게 느껴졌는지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올라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울면 이상한 것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가르치다가 나와서 울면서 원장실에서 난로를 켜 놓고 앉았습니다. 그냥 춥다고만 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스무 살 되던 해를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과 고민에 싸여서 보냈지만, 서서히 환경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아픈 몸은 방학 때 한국에 온 언니와 함께 헬스를 배워 운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아팠던 걸 기억해보면 가만히 누워서 밥만 먹는 걸로는 체중이 늘지 않았거든요. 병원에서 여성호르몬제와 칼슘을 처방받아 먹었고, 과식하면 운동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식사도 최대한 알맞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친구들도 엄마와 언니가 다시 연락하면 된다고 해서 중학교 시절 친구들에게 조금씩 연락을 했고, 아프다고도 전했습니다. 다행히 친구들은 걱정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회복을 했고, 안정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 해, 외국에서 공부하였던 경험을 살려 어학특기 전형으로 대학 입시지원을 하였는데, 모두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대학의 필요성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고, 진로에 대해서도 저를 돌아보며 무엇이 필요한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상의를 거친 후, 관심이 있던 건강 분야를 살려 보건과를 공부한 후에, 보건직 공무원으로 일하면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부모님은 제 성격을 보았을 때 사기업에서 일하기에는 상사의 간섭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셨어요. 패션디자인도 정말 관심이 많아 디자인 쪽의 취업 전망을 조사했었는데, 일에 비해 보수가 크지 않고 일자리도 많지 않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수능에 필요한 정보를 모은 뒤, ebs인강을 통해 수능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공부할 양에 비해 시간이 너무 빠듯했기에, 하루 식사 시간과 씻는 시간, 운동하는 시간을 정해 놓고 그 시간을 제외하고는 공부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래 누워 있으면 근육이 풀리면서 뼈가 아팠기 때문에 늦잠을 잘 수도, 운동을 빼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밥도 균형 있게 챙겨 먹었습니다. 최대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집중이 안 될때 운동을 하면서 몸을 관리해 나갔습니다. 성인이라고 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내가 감당해야 하고, 대학 준비도 필수가 아닌 내가 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부모님 학원 학생을 맡아서 가르쳐야 할 때에도 공부에 올인하고 싶었지만 공부 준비와 일을 병행했습니다. 같이 근무하는 선생님도 계셨기에 나름의 사회생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걷기 운동이 필요할 때는 꽃이 많은 아파트 옆 산책길을 걷는 것을 좋아했고, 예쁜 양산을 샀습니다. 대학에 다니고 있는 중학교 친구들과도 한 두번 다같이 만났습니다. 지식 수준은 대학을 다니고 있던 친구들의 수준에 준하고자 했습니다. 더 좋은 대학에 다닌다고 더 나은 사람인 것은 아니겠지만 왠만큼 공부를 열심히 했던 친구들이기에 이름 있는 서울의 대학에 재학하고 있었습니다. 바깥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성인으로서 대할 법한 대로 하고자 했습니다. 선거 후보의 공약도 눈여겨보고 어떤 영향력이 있을지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20대의 저축과 돈 관리에 대해서도 알아보았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상황 중에 쇼핑 등 다른 활동을 하는 것이 왠지 혼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잘못된 일이 아니고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제 돈으로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도 사고 물건도 사 보았습니다. 돈을 낭비하지 않고 잘 관리하려는 언니를 보며 효율적인 소비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학생을 가르친 돈으로 가족에게 외식도 샀습니다. 혼자 놀러 나가도 보고,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혼밥도 해 보았습니다.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혼자 여행도 가 볼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스무 살, 스물 한살 동안 저로서, 독립된 사람으로 서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서울 내 대학 몇 곳과 마지막으로 집 근처에 있던 의료부문에 특성화된 4년제 대학교에 원서를 넣고, 수능을 본 후, 결국 수시 중 최저기준을 사용했던 집 근처의 보건과 한 곳에만 합격했기에 그 곳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을 가서는 본 성격은 낯을 많이 가렸지만, 나이에 맞게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학생을 가르쳤던 것처럼 발표도 하였고,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공식적인 행사에는 참가했습니다. 등록금을 생각하면 수업 하나도 수업비가 꽤 되기 때문에 열심히 들었습니다. 나 혼자 움직여야 하니까 동기들을 많이 따라다니지는 않았고, 허리를 지켜야 해서 같이 있다가도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걸어 다녔습니다. 동기 동생들에게 간식도 사줬습니다. 동생들은 편의점을 잘 갔는데, 아직 건강이 좋지 않은 저는 제대로 된 밥을 챙겨먹고 싶었기에 점심시간에 같이 있을까 말까도 많이 망설였습니다. 모든 것에 효율적이고 공부도 사람을 대하는 것도 잘 하려고 애썼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사람들과 놀 줄은 몰랐던 것 같고, 친구들의 말을 잘 들어 주고 이것저것 챙겨 주기는 하지만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친구들이 마음의 거리가 달랐던 탓인지 저를 제외하고 다른 곳으로 차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굉장히 마음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로 왠지 아무렇지 않은 듯 함께 할 수가 없어서 많이 가까워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듯이, 공부도 학점을 신청하고 꼭 해야 하는 만큼 다 했습니다. 다행히 재산이 별로 없어 국가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빚을 만들지 않아야 좋고, 가계 부담이 되므로 성적장학금을 받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조별과제는 공적 사항이고, 내 공부는 사적인 사항이니까 둘 다 잘 해내기 위해 애썼습니다. 너무 힘들었지만 첫 학기를 그렇게 끝내고 첫 방학 때는 사람들을 보지 않고 집에서 게임과 만화를 보며 많이 쉬었습니다. 정말 좋긴 했지만 그 시간 후에는 미래를 위해서는 뭔가 남긴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방학 때마다는 공무원에 가산점이 되는 자격증을 따려고 계획하고 공부했고, 그리고 자격증 중 하나가 요구하는 수업들을 모두 이수하려고 계획을 짰고, 학기 중이든 아니든 운동도 계속 했습니다. 몸이 힘들면 지치고 공부도 집중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지내갔고, 대학 동기들과는 따로 학교 외에 만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익숙해졌습니다. 동생들은 성격이 나쁜 건 아니라 과제를 함께 하거나 만날 때 잘 대해 주긴 했습니다. 여름 방학 때는 언니가 한국에서 계절학기를 들으며 같이 지냈기에 함께 맛있는 음식도 먹고 외출하기도 하며 지냈습니다. 2학년 말이 되자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집에서 같이 살던 언니는 미국에 일할 기회가 생겨 돈을 벌러 떠났습니다. 대학 전 시절 배운 운동으로 몸을 관리하는 데에도 한계가 왔습니다. 아직 튼튼하지 못한 뼈가 아프기 시작하자 불안해지고 힘이 들었습니다. 밖에 나가 다른 활동하는 일 없이 학교와 집이 반복될 수록 혼자 있는 정적이 갑갑하고 힘든 느낌이 들었습니다. 해왔던 공부 방식도 에너지가 떨어졌습니다. 학교에서만 얼굴 보고 지내는 관계가 아닌, 친구를 만들고 싶었는데 그런 관계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참 애매했습니다. 학교의 기독교 동아리에도 나가봤지만, 공부하면서 활동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더 나가지 못했습니다. 2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이 되었을 땐, 하고 싶었던 공부와 약사의 전망을 생각해서 휴학하고 약대 입학시험을 잠시 준비하려고 했다가 2년 간 공부를 이어갈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형편이 언제 바뀔지 모르기에 국가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때 공부를 해서 졸업장을 따라고 하셔서 휴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래를 위해 따려고 생각했던 자격증은 계획대로 다 취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3학년이 되자 어떤 수업을 들어야 앞날에 도움이 될지 방향도 애매했고, 항상 감당할 만큼 학점을 신청했었는데 신청한 수업의 공부량도 너무 많아 공부를 하려고 하니 숨이 막혔습니다. 연구 수업의 과제도 너무 어려웠고, 학교 인간관계도 어려웠습니다. 계속 소통해야 했고, 자신은 없는데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바로 앞의 일을 처리하면서도 불안에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고는 했습니다. 제 방향을 정하지 못하니 방학 때 친구들을 만나도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동나이대의 친구들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대학 동기 동생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왜인지 점점 제가 알던 저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아 저를 되찾고 싶어서 mbti 나 에니어그램 등 성격검사 등을 했습니다. 동기 동생은 저에게 너무 생각이 많다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그런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고 느꼈습니다. 무얼 할지 모르겠어서 전에 없이 음악도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을 대해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길거리 심리카페 홍보를 통해 실제로 공기관 상담사로 일하고 계신 코칭 선생님을 만났는데, 이 분을 대할 때 나로 자연스러운 대화를 하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내 나이에 맞는 대로 전문성 있게 대화해야 하는 일인지, 사람을 대하는데 참 어려웠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나이에 비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정도가 중학생 수준인 것 같다고 하셨고,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저 스스로의 결정을 많이 세워주기 위해서 도와 주려고 하셨습니다. 성격에서 모자란 부분은 노력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을 뵐 때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힘들었기 때문에, 몇 번 코칭을 받다 그만 받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상담을 받던 사람 중에 저와 친구로 잘 지낼 것 같다는 교회에 다니는 동생도 소개해 주셨는데, 몇 번 카톡으로 대화만 주고받다 결국 더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조용하게 지냈고, 아는 사람들은 마주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말을 아꼈습니다. 3학년 말쯤 되니 팔다리가 멀쩡히 있는데도 두려움 때문에 꼼짝할 수 없는 경우까지 겪게 되었고, 일어나지지를 않아서 겨우겨우 침대에서 일어나서 시험을 치러 갔습니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는 힘이 없었고, 뭘 할지 모르다 부모님 방 침대에서 쓰러져 잠들고는 했습니다. 절망하는 느낌도 겪어 봤습니다. 부모님은 다른 곳에 일자리를 옮기셔서 주말에만 집에 오셨기 때문에, 전화 통화를 하고는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방향을 잡아서 준비하고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저에게 지금 바로 눈 앞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혹시 약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함께 정신건강의학과에 갔는데, 우울과 집중이 떨어진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약하게 처방받았는데, 하루 세번 약을 먹기가 힘들고, 먹고 안먹고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몇 개월만 병원에 다녔습니다. 4학년 때였는데, 그 무렵 다니던 교회 청년부에 가서 노래는 잘 못하지만 찬양팀에 지원했습니다. 폐가 될 수도 있지만 신앙도, 좋은 관계도 되찾아보고 싶었거든요. 가끔 방에 박혀서 교회도 어디도 나가고 싶지 않은 때도 있었지만 가능한 한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이 일도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이고 공적인 것 같았기 때문에 내 자리에서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 소모임도 거절해도 되는 일인지 등을 잘 판단하기가 힘들었어요. 동생들과 언니들은 항상 잘 대해 주었는데, 저는 잘 친해지지 못했습니다. 4학년이 되던 해 학교에서는 많이 소심해졌고, 대학 내내 필수 수업조건을 채웠던 자격증 시험은 그 해 접수도 놓쳐버려 그냥 냅뒀습니다. 지금은 이사를 하면서 있던 교회를 떠났고, 다행히 학점은 3점대 후반으로 지켰습니다. 혹시 취업을 하게 되면 걸림돌이 되게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지킨 셈입니다. 그렇지만 목표로 했던 보건공무원에 가산점을 주는 자격증도 따지 못했고, 당장 공무원 준비를 하라니 너무 쉴 새 없이 밀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알아보다 보니 국가직 중 인원을 많이 뽑는 직렬이 있어서, 올해 시험을 계획을 짜서 열심히 달리다가 실제로 소화할 수 있는 계획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공부를 놓았습니다. 아예 올해를 포기하고 준비를 하려고 해도 자꾸 놓게 되고, 좀 나으려니 해서 학원에 가도 수업에 집중이 안 되고 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고,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혼자 잘 다니네, 저 사람은 조심성이 많지만 이러이러한 성격이겠구나 하고 성격 분석을 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철학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정이 있는지 없는지, 모호해져서 제 성격을 스스로 모르겠어요. 제가 얼마나 능력이 있고 그리고 무엇을 하려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옛날의 저는 제가 이성은 냉철하지만 따뜻한 감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느꼈고, 지식이나 나만의 철칙, 관심사 등 내면이 풍부하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혼자 무엇을 할지도 정하지 못하고, 돈이나 사회도 잘 생각하지 못하고, 관계에 있어 제 중심도 못 잡는 것 같아요. 친구들에게 연락도 잘 못하겠어요. 아버지께서는 제가 고용 안정성이 있는 직업이 아니면 도시에서 빚만 지기 때문에, 시골로 함께 내려가고 싶지 않고, 문화 생활에 아쉬움이 있으면 공무원 합격을 위해 열심히 공부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필요성을 느끼면 지속할텐데, 저 자신이 너무 모호해요.
트라우마무기력해의욕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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