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개·4년 전
오늘 수험생 시절 쓰던 문제집과 노트를 정리했어요. 후련함과 함께 그 때 힘들었던 기억이 몰려와 눈가가 욱씬거리더라고요.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보던 개념노트와 힘들 때마다 적었던 일기까지. 다른 건 다 버려도 그 두 개는 못 버릴 것 같아 서랍 맨 아래칸에 넣어놨어요.
12월 말, 4지망 대학교에 추가합격을 하고 그 다음날에 비가 내렸어요. 국가장학금을 신청하러 어머님과 은행에서 만나기로 해서 걸어가는데 비 때문인지 눈물이 나더라고요. 지난 삼년동안 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심한 자기검열에 살았는데 고작 대학교 하나 합격했다고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게 얄미웠어요. 그리고 은행에서 집으로 돌아와 그 날은 계속 비가 오는 걸 지켜봤어요. 수능을 마치자 그토록 하고싶었던 오락이 이상하기 매력적으로 보이질 않더라고요. 안개가 잔뜩 낀 흐린 하늘을 보는 게 그 때는 더 좋았어요.
비가 오고 난 뒤 땅이 굳는 것처럼, 그 때부터 하나씩 삼년간 저를 괴롭혀왔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어요. 마침내 오늘 딱 두 권만 제외하고 저를 묶던 족쇄를 풀었네요. 이제는 먹어도 스트레스로 인해 속이 더부룩하지 않고, 밤에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잘 수 있게 됐어요. 생활이 안정되자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가 생기네요.
이 글을 보는 당신의 삶에도 여유가 생기면 좋겠어요. 전깃줄에 걸린 달이 예뻐서, 푹 자고 일어난 뒤 개운함이 좋아서, 계획되지 않은 장소와 시간에 뜻밖의 행운을 발견해서. 당신이 숨을 쉬는 그 장소가 삶의 터닝포인트가 됐으면 좋겠네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의 싸움을 해내고 있는 모두에게 사소한 행운이 모여 큰 행복이 찾아오길 바라요. 수고하셨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각자의 자리에서 생을 이어나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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